프랑스혁명이 일어난 과정과 그 이유를 알아보자.
불평등한 신분제
1700년대 후반 대부분 프랑스 국민은 이런 불만과 분노가 엄청나게 쌓여갔다. 불평등한 신분제로 말이다. 당시 프랑스는 3 신분으로 나눴는데 1 신분은 성직자였고 2 신분은 귀족 그리고 나머지 3 신분은 평민이었다. 이 중에서 1 신분과 2 신분 다해도 2%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 전체 98%가 농민 노동자 상인 수공업자 등으로 이루어진 계층이었다. 그 소수의 특권을 가진 계층은 세금도 내지 않고 온갖 토지와 관직을 독차지하고서 모든 이익을 다 챙겼다. 3 신분은 무거운 세금을 내면서 온갖 의무를 다하며 힘겹게 살고 있었다. 또한 정치참여 권한도 없었다. 하지만 3 신분 중에는 상업으로 큰돈을 벌어 영향력이 커진 평민도 있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귀족들이 누리는 특권은 누리지 못했다. 그 무렵 미국 독립 혁명소식이 프랑스에 들려왔다. 아메리카 식민지 사람들이 영국에게 맞서 독립전쟁을 일의 켜 자유롭고 평등한 미국을 세웠다는 게 3 신분 사람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무렵 프랑스는 나라가 엉망진창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 사치스러웠고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은 미국 독립전쟁에 끼어들어서 나랏돈이 바닥이었다. 그러자 루이 16세는 국가 재정을 해결하려고 성직자와 귀족 계급에게도 세금을 매기려고 했다. 그에 따라 귀족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삼부회를 열기로 했다. 이윽고 루이 16세는 나라가 어려우니 귀족과 성직자가 세금을 내는 일을 투표로 결정하자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3 신분이 요구하는 국민의회까지 못하게 베르사유 궁전 회의실을 막아버렸다. 국민 의회는 베르사유 궁전의 테니스장에 모여 목소리를 외쳤다. 이것이 테니스 코트의 서약 또는 테니스 코트의 맹세라고 한다.
프랑스혁명과 인권선언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를 해산시키려고 군대를 불렀다. 파리시민들은 이에 분노하고 국민의회를 지키기 위해 민병대를 꾸렸다. 군대는 무기고를 습격해서 무기를 갖추고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했다. 바스티유 감옥은 국왕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두는 곳으로 절대권력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줬다. 감옥을 부순 것은 죄 없는 시민을 왕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는 강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왕의 군대가 시민을 진압했지만 시민들의 맹렬한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바스티유 감옥은 시민들에게 점령되었다. 프랑스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점령됐다는 소식을 들은 지방 곡곡에 있는 농민들은 들고일어났다. 왕의 횡포와 세금에 억눌린 농민들은 영주성으로 쳐들어가 땅문서와 집문서 전부 불태우고 귀족과 성직자 관리들을 죽였다. 사방팔방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루이 16세는 국민 의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서 1789년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은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고 나라의 주된 권리인 주권은 국민에게 있으며 언론, 사상, 출판,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이 담겨있다.
루이 16세 처형과 공포정치
이런 상황 속에서도 루이 16세는 핑계를 대며 국민의회와 시민의 권리선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절대 왕정의 권력을 빼앗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왕과 귀족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사치를 즐겼다. 이에 분노한 시민은 다시 들고 일어섰다. 2만여 명의 여성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가자 남성들도 뒤를 따랐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민들에게 둘러 쌓인 채 궁전에서 끌려 나왔고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져 시민의 감시를 받으며 지냈다. 그런데 1791년 루이 16세와 왕족들이 마리 앙투아네트 친정인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다 발각됐다. 국왕은 다시 감옥에 갇혔다. 국민의회는 왕의 권력을 제한하며 의회가 국민의 뜻에 따라 나라를 이끌어간다라는 새 헌법을 만들어 발표했다. 이로서 국민의회가 해산하고 입법 의회가 탄생했다. 프랑스는 입헌 군주국이 되었고 왕의 절대 권력은 휘두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연합군이 프랑스를 공격했다. 프랑스혁명이 자기 나라로 번질까 봐 공격했지만 프랑스 시민들이 힘을 합쳐 연합군을 물리치고 그 후로 프랑스혁명의 자유와 평등 정신은 더욱더 세계 여러 나라로 퍼져갔다. 이 과정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도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이에 왕비의 모국이었던 오스트리아와 영국 프로이센 등 중심으로 혁명의 전파를 막기 위해 동맹하여 여러 차례전쟁이 벌어졌다. 왕당파를 비롯한 혁명에 반대하는 세력도 커지면서 혁명정부는 어려움에 처했다. 국민공회 급진파인 자코뱅 세력은 로베스피에르 중심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혁명 재판소를 설치하여 반대 세력을 단두대로 처형하는 공포정치를 펼쳤다. 이 공포정치는 너무나 가혹하여 시간이 지날수록 불만이 커져갔다. 결국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면서 공포저이는 무너지고 5명이 행정을 담당하는 총재정부가 출범했지만 경제난과 재정난으로 국내외는 불안정은 지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