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 / 2023. 2. 23. 00:17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개혁, 종교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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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신교도들을 학살하는 로마 가톨릭교도 군대

 

가톨릭 교회의 개혁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위기감을 느꼈다. 기존 가톨릭 교회 신도들은 점점 줄어들고 신교신도는 계속 늘어나서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변화기 필요했다. 그러자 가톨릭 교회 안에서 스스로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는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에스파냐 수도사인 이그나티우스 데로 욜라는 여러 수도사와 함께 1540년 예수회를 설립했다. 로욜라는 원래 기사였는데 프랑스와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오랜 치료 중에 예수일대기를 다룬 그리스도전과 성인열전을 읽고서 수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예수회는 예수의 군대라는 뜻의 모임으로 교황에게 복종하며 교리와 규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규율을 지키는 모임이었다. 줄어들었던 신도들을 다시 불러드리려고 예수회가 열심히 노력한 결과로 가톨릭 교회는 차근차근 힘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잃었던 신뢰를 회복하고자 많은 문제점들을 반성하고 잘못된 점도 고치면서 회의를 지속적으로 열어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3차례나 회의를 열었는데 이것이 트리엔트 종교 회의 또는 트리엔트 공의회라고 한다. 원래 이 회의는 신교들과 화해의 목적으로 회의를 열었지만 신교들이 참석을 하지 않아서 점차 종교개혁에 대항하는 반 종교개혁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 회의로 인해서 아주 중요한 결정을 하게 된다. 면벌부 판매를 중단했고, 성직자가 부정부패를 금했으며, 성직을 돈 주고 사고파는 것 또한 금지하게 되었다. 이처럼 그동안 지적된 부분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면서 더욱더 교황권을 강화했다. 그런 결과로 인해서 신교와의 갈등은 더욱더 멀어져만 갔다. 시한폭탄처럼 언제 터질지 모르는 구교와 신교의 팽팽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녀사냥

원래 유럽에서 종교개혁이 있기전에도 종교재판이 있었다. 하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되면서 각 유럽나라에서 종교재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542년 교황 바오로 3세는 신교탄압을 위해서 종교 재판소를 설치했는데 그 후로 종교재판은 엄청 심해졌고 교황청과 생각이 다른 사람은 이단으로 찍혀 화형에 처한 일이 빈번했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힘이 막강한 에스파냐에서 교리와 맞지 않은 주장을 하거나 금지된 책을 펴거나 읽는 사람들은 모두 악마로 내몰았다. 종교재판을 명목으로 심하게 고문하고 화형에 처하는 등 아주 가혹하고 잔인하게 신교들을 탄압했다. 또한 에스파냐어로 번역하는 것도 종교재판에 대상이었다. 그 종교재판으로 30만 명이 희생당했으며 그중 10%는 살아 있는 채로 화형 당했다고 한다. 이때 마녀재판이라고 기승을 부렸다. 농사가 안되거나 전염병, 천제지변이 일어나면 마녀가 해코지한다고 해서 무고한 여자들을 잡아서 마녀라고 스스로 자백할 때까지 온갖 고문을 해서 죽였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들은 주로 늙은 여자, 혼자 사는 여자, 하녀 등등이었다. 그 당시 십자군전쟁과 흑사병, 종교개혁으로 사회가 혼란하여 가톨릭교회가 위기에 빠져 가톨릭교회를 회복하기 위해서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마녀만 없어지면 사회가 안정되고 예전처럼 평온해질 것으로 믿고 교회에 의지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백년전쟁에서 프랑스를 구한 잔다르크도 마녀로 지목되 마녀재판받고 처형되었다. 

 

위그노 전쟁

위그노 전쟁은 프랑스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종교개혁으로 생겨난 신교도인 위그노가 생기자 프랑스 국왕은 그들을 억누르기도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양면정책을 썼는데 그러는 사이 위그노는 점점 더 늘어나 시민뿐만 아니라 귀족까지도 신교가 퍼지게 되었다. 기존 로마 가톨릭교와 위그노가 서로 마찰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 어린 국왕을 대신해서 프랑스를 다스리던 왕의 어머니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손잡고 벌인 학살이다. 로마 가톨릭교회군대 가 예배 보러 온 위그노 수만 명을 학살한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인인 바르톨로메오를 기념하는 축익에 벌어진 일이라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이라고 불린다. 이로 인해서 가톨릭교도와 위그노 사이의 갈등의 시작되면서 프랑스는 쑥대밭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앙리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면서 로마 가톨릭교도와 위그노의 갈등은 진정되면서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1598년 종교자유를 인정하는 낭트칙령을 발표 함으로써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고 프랑스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프랑스 경제도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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